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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과 저 세상에는 무엇이 있을까. 참 궁금증을 연발할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래. 다른 것들이 한 둘 뿐이랴. 인간의 머리로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 두드러진 하나는 경계인 듯하다. 경계의 속성은 분별이 아닌가 한다. 땅의 경계가 나의 것과 상대의 것으로 분류해 놓듯이 말이다.
이러한 이분법에 길들여진 탓인지 모르겠다. 오래 전 폭염을 무릅쓰고 정성을 다해 나무를 심은 일이 있다. 경계 없는 곳에 경계를 두기 위한 일이었다. 무릎 높이의 회양목을 여러 주 심었다. 간격이 성근 곳에는 사철나무로 메우기도 했다. 성글어서 성근 게 아니고 암반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주변 흙을 모으고 분이 잘 떠진 뿌리가 실한 나무가 선발이 된다. 이제 제법 어우러지는 울타리가 되었다.
기도터에 오르는 능선 일부의 모습이다. 그 울타리 옆에 불두화(佛頭花) 한 그루가 있다.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절로 크는 나무이다. 일 년이면 두어 자 정도는 족히 자라는 왕성함을 보이고 있다. 부처님의 두상과 같이 생긴 꽃이라 하여 붙여진 꽃이다. 서양에서는 눈뭉치나 눈덩이와 같다 하여 Snowball tree라고 부르고 있다. 똑같은 나무를 보고 동서양의 시각 차이가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불두화. 영락없는 부처님의 두상 모습이다. 저 나무에 골바람이 부는 날이면 꽃잎이 진다. 진다하여 발밑에 뚝 뚝 떨어지는 동백꽃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단 한 번에 지고 마는 군자란의 모습 또한 아니다. 주변에 흩날리고 마는 아름다운 이름 불두화이다. 흔적 없이 떠나려는 굳은 다짐이라도 한 듯 산산이 날리고 있다. 떨어져서도 한 무리를 이루지 않는다. 곧 대지에 흡수되고 마는 비경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누군가는 눈이 쌓이는 모습을 소복소복이라고 표현한다. 소복소복은 자신의 속성을 잃지 않으려고 몫을 챙기는 속성이 있다. 차곡차곡 또한 유사한 의미를 지닌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눈도 대지에 내릴 때의 모습일 따름이다. 어디 눈이 땅에만 내리던가. 강에도 바다에도 개울에도 가리지 않는다. 물위에 내리는 눈은 자아상실의 표본이 된다. 그곳에는 소복소복도 없고 차곡차곡도 없으니 말이다. 상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혹한 말일까. 망아(忘我)쯤으로 생각한다면 눈에 대한 배려가 조금이라도 있을 듯하다. 바다 위에 사뿐히 내리는 저 낯선 객들의 모습을 보고 탄성을 자아낸다. 비경이라 하기도 하고 선계(仙界)라고도 한다. 처소에 따라 가지가지의 묘경을 그려내는 자연의 위대함에 몰입하면 할수록 자신의 영혼은 맑아져가는 것을 느낀다.
어떤 일을 맡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둘이면 서로 의견이 상충되는 일이 생겨 다투게 된다. 그래서 ‘오소리감투가 둘이다’는 속담이 생겼다. 사람들은 자기가 그 일을 해냈다는 공을 드러내고자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강도가 더해지면 좋았던 우정도 금이 가고 두터웠던 신뢰도 무너지기도 한다. 이기심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태생적인 인체의 구조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불두화는 안팎이 없어 보인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도 표표히 지고 만단 말인가.
좁은 오솔길을 지나 돌계단을 지나면 안식처가 나온다. 서너 평 남짓한 공간의 정진터이다. 깔개를 펴고 앉으면 온갖 시름이 불두화 꽃잎처럼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그 무거웠던 짐이 어디로 갔는지 참 신기한 일이다. 드넓은 판도방(判道房)에 비교할 수 없는 좁은 공간이 이렇게 편안하다니. 판도방에서 온갖 시름을 지고, 이고 사는 영혼이 사그라들고 있는 자들이여. 무엇이 당신을 병들게 하고 있는가 반문해 보아라. 깔개 위에서 천하를 보고 우주의 운행과 궤를 같이 해 보아라. 당신의 영혼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마치 화톳불에서 온기를 느끼듯이.
일부러 솔가리를 긁어모은 것도 아니다. 그저 해가 거듭하니 쌓인 것이다. 두툼한 햇솜 이불처럼 쌓여간다. 저 침엽수 잎 하나하나가 한 뭉치를 이룬다. 마치 이불에 솜이 뭉치듯이 뭉쳐있다. 영혼을 맑히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열쭝이의 앙증맞은 모습이란 또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유유히 창공을 나는 새도 처음부터 그 모습과 능력으로 태어나지는 않았다. 모든 날짐승들은 열쭝이의 시절이 있었다. 겨우 날기 시작한 시절. 어미 새가 가르쳐 주는 대로 훈련을 반복하여 조금씩 전진도 하고 이륙도 한다. 이륙이라야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의 이동이다. 쉬울 듯하지만 힘든 나날의 반복이 없었다면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 수 있겠는가. 또한 비경이란 이러한 것들의 변화된 모습이 아니겠는가.
꺼펑이를 걷어내자. 그 꺼펑이는 위장시키는 속성이 있다. 누구나 속살을 드러내는 것을 꺼린다. 배운 사람일수록 그 도는 높다. 반면에 진면목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소박한 사람이고 진솔한 사람이다. 자기 생업에 열중하고 있는 농부의 마음이고 어부의 마음이다. 그들의 삶은 가식이 없기에 꺼펑이 따위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불두화의 꽃차례가 순서 없이 지고 있다. 참 오묘하다. 이 시간만큼은 자연의 질서 따위란 없다. 그저 우수수 질뿐이다. 인간의 번뇌, 사량, 분별심도 한 순간에 떨쳐내라는 무언의 몸짓인 듯하다.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의 영혼에 휴수동귀(携手同歸) 할 수 있는 도반이 있다. 피는 꽃도 아름답지만 바람에 날리는 낙화도 반려자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미련의 손짓이나 언어의 유희를 남기지 않는 모습이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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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법주사로 출가 수행정진했고, 동국대학교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학교 선학과 교수, 미국 하버드대 세계종교연구센터 초청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장, 정각원장, 한국선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정년 후에도 동국대 불교학술원장 겸 동국역경원장을 지내며 불교학계 발전과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현재 동국대 명예교수로 정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선학의 이해』, 『선어록 산책』, 『선문선답』, 『선문보장록』, 『선 사상론』, 『선 수행론』, 『한국선론』, 『벽암록의 세계』, 『한국을 빛 낸 선사들』, 『선심으로 보는 세상』 연보로 구성된 『최현각 선학전집』(전11권), 『내 사유의 속살들』, 『현각스님의 마음 두드림』등이 있고, 그 외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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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59년 6월 9일 
동국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