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고(思考)를 한다. 존재, 현상 등에 관한 깊은 통찰과 사유의 결과를 통해 그 경계를 글로 푼 것이 철학이다. 불교는 철학이면서도 그것을 포함한 종교이다. 니체 칸트 화이트헤드 비트겐슈타인 등과 불교사상을 접목한 연구는 근현대기에 이으러 동ㆍ서양에서 활발히 진행돼 왔지만 한국불교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드물었다.
이런 가운데 한국 대표 선지식들의 불교사상과 서양 철학자 사상의 만남을 통해 시도한 행사가 열려 눈길을 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원장 김종욱)은 1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한국불교와 서양철학’을 주제로 부처님오신날 봉축세미나를 개최했다.
“마음은 이미 그 마음을 알고 있어”
한자경 교수(이화여대)는 주제발표 ‘눈이 눈을 볼 수 있는가’에서 ‘나는 나 자신을 알 수 있는가’의 문제를 ‘눈이 눈을 볼 수 있는가’ 비유를 통해 논지를 전개했다. 발표에서는 원측(613~696)의 유식과 칸트(1724~1804)의 초월적 관념론이 비교됐다.
자아의 자기인식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 밝혀져야 할 것은 자아의 인식능력이다. 자아의 인식능력은 자아의 세계인식을 통해 드러난다. 인식은 존재의 인식인 만큼 존재는 인식된 존재. 우리가 인식하는 존재는 인식하는 마음 바깥의 존재가 아닌, 인식하는 마음에 포섭된 존재, 마음과 다르지 않는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와 인식에 대한 사유는 불교에서는 3~4세 유식불교를 통해 집중적으로 조명됐지만, 서양철학에서는 18세기 칸트가 최초이다.
한 교수는 “칸트가 ‘눈은 눈을 볼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반성의 방식으로는 마음 자체를 알 수 없고, 반성이 아닌 지적 직관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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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와 다르게 원측은 반성의 방식이 아닌 수행을 통한 계합의 방식으로 눈이 눈을 볼 수 있다는 것, 마음이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논했다.
한 교수는 “원측과 칸트 모두는 마음이 인식하는 세계에 관한 한 인식과 존재가 불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통찰했다”고 강조했다.
칸트가 마음은 마음 자체를 알 수 없다고 본 것에 대해 한 교수는 “인식과 존재의 완전한 일치는 오직 신(神)에게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서양사유의 특질”이라고 분석했다.
내가 인형을 만들면, 나는 인형을 알지만 인형은 자기 자신을 모른다. 그렇듯 신이 인간을 만들었기에 인간을 아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는 설명이다.
반면에 불교는 모든 생명체를 바깥에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생명의 근원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자신 안의 진여의 증득, 마음의 자기 증득을 지향하는 것이 불교이다.
한자경 교수는 “불교에서 안불자견(眼不自見)을 말할 때는 눈이 눈 자신을 알 수 없다거나 인간이 인간 자신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불교는 처음부터 인식 주체로서의 인간 자신에 대한 절대적 앎, 궁극의 깨달음을 지향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대승불교에서 눈은 그 자체가 봄(앎)이며, 마음은 이미 자기 자신을 알고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세계를 아는 눈이 눈 자신을 모른다면, 우리는 결코 인생의 꿈에서 깨어날 수 없을 것”이라며 “다른 것을 밝게 비추는 빛은 그 자신이 가장 밝은 법이다. 마음이 이미 마음 자신을 알고 있기에 그 마음이 세계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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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는 악함을, 니체는 약함을 경계해”
박찬국 박사(서울대 철학과)는 ‘만해 한용운과 니체’를 발표했다. 박 박사는 주제발표를 통해 데카르트, 칸트의 사상이 불교와 통한다고 평가했던 한용운과 니체의 사상적 연관성을 규명했다.
니체는 불교를 기독교처럼 염세주의적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불교를 개신교보다 현실주의적ㆍ실증주의적 종교라고 평가했다.
그 이유는 인간의 고통에 대해 기독교는 원죄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하는데 비해 불교는 인간 삶의 현실에 대한 냉정한 관찰을 통해 고의 근원을 해명하려고 한다는 점을 꼽았다. 또, 기독교는 선악의 기준이 신에 의해 고정된 것이라고 봤지만, 불교는 인간 고통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선, 그렇지 않은 것은 악으로 간주했다.
박 박사는 “만해는 니체의 불교 이해에 더해 불교의 평등주의적ㆍ자유주의적ㆍ사해동포주의적 성격을 간파했다”고 말했다.
불교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귀한 불성이 존재한다고 보는 점에서 평등주의이며,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자유주의며, 자국ㆍ타국과 인종간 차별을 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주의라는 설명이다.
박 박사는 “만해는 불교를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하고자 하는 구세주의적 종교라고 평가했다”고 강조했다.
양계초를 통해 사회적 다윈주의를 수용했던 만해는 조선이 일본에 지배당한 원인을 일본의 악랄함과 탐욕보다는 ‘수백 년에 걸친 부패한 조선의 정치와 조선 민중이 현대 문명에 뒤쳐진 것’에서 찾았다.
박찬국 박사는 “약자가 지배당하는 책임을 강자보다는 약자 자신에게서 찾는 태도는 만해와 니체가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만해는 승자가 되는 자는 근면하고 용맹하기 때문에 승자가 되고, 패자가 되는 자는 게으르기 때문에 패자가 된다고 역설했다.
박 박사는 만해의 이러한 견해는 불교의 선악 파악과 대립되는 것으로 사회적 다윈주의의 시각이며, 불교보다는 니체의 시각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도 불교는 악(惡)함을 경계하는 반면, 니체는 약(弱)함을 경계한다고 강조했다.
불교는 탐욕과 분노를 가장 큰 악덕으로 경계하지만, 니체는 현실을 악하고 고통스런 것으로 혐오하는 염세주의나 자신을 학대하는 죄의식, 비겁함, 비굴함 등을 더 큰 악덕으로 간주한다는 설명이다.
박찬국 박사는 “니체는 케이사르나 나폴레옹 등을 찬양할 수 있지만, 불교는 이들까지도 불쌍한 중생으로 본다”며 “불교적 입장에서는 어떤 사람이 지배를 당할 때 비난 받아야 할 사람은 지배 당하는 사람보다 탐욕에 사로잡힌 강한 자들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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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만해는 니체와 유사하게 양육강식의 현실에서는 부처의 마음뿐 아니라 현실적인 힘도 필요하다고 봤다. 만해의 불교를 무인(武人)의 불교라고 평가하는 것이 한 예이다.
박찬국 박사는 “만해가 이순신, 을지문덕을 찬양했다고 해서 만해의 불교를 무인의 불교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식민지 치하에서 쌓인 울분의 발로라고 봐야한다. 만해의 독립운동을 지탱한 근본정신은 평등사상, 자비사상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외에도 행사에서는 ▷김종욱 원장(불교문화연구원)이 ‘본체와 현상의 공속’을 ▷권서용 교수(부산대)가 ‘의상과 화이트헤드’를 ▷김영필 교수(대구교대)가 ‘지눌과 윌리엄 제임스’를 ▷홍창성 교수(미네소타주립대)가 ‘깨달음의 패러독스와 사적 언어논증’을 발표했다. |
